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이 끝난 이후 이번엔 [[미국]]이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에 간섭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복잡한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나, 남베트남을 적화되게 방치하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같은 편인 [[제1세계|자유 진영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적화될 것이라고 우려하여[*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이때는 [[6.25 전쟁]]이 정전으로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6.25 전쟁은 종전도 아닌 정전으로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땐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가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었는데 때마침 프랑스를 물리친 베트남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예측은 베트남 전쟁으로 현실화되었긴 하지만, 도미노 이론을 보면 사실상 실패한 이론이다.오로지 캄보디아, 라오스만 적화되었다.] 우방국인 남베트남을 보호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미국은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의 행동에 부정적이었으나 [[6.25 전쟁]]의 발발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태도를 바꾸어 전비와 무기 대부분을 지원한다. 미국의 지원 액수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전비의 78%에 달했다.[*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이때 지원한 물량이 전차 1,400대, 비행기 340대, 정찰 보트 350대, 소총 24만 정에 탄약이 1,500만 발 등 사실상 사람 빼고는 미국이 전쟁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이유야 물론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전쟁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름 [[제1세계|자유 진영]]에서 구(舊) 식민 체제의 해체를 통해 [[제2세계|공산 세력]]과 맞서고자 했던 만큼 미국의 지원이 공짜는 아니고 남베트남을 독립시키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그건 미국 입장이고 북베트남과 베트콩 입장에서 보면 구 식민 세력을 아무 생각 없이[* 다만 후일의 베트남도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은 식민지 해방 전쟁과 동급으로 여기진 않고, 남베트남 통일 전쟁의 일환으로 해석한 걸 보면 미국과 프랑스는 확실히 구분한 듯하다.] 지원한 또 다른 적이었다. 호찌민은 2차대전 때의 동맹관계를 떠올려서인지 미국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지지를 호소했으나, 쓰면 버리고, 달면 사용해먹는 냉엄한 국제 외교 정치의 현실과 자신과 자신이 이끄는 정당인 베트남 공산당이 30년대 이래로 쭉 어떤 짓을 저질러왔는지를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헛된 기대일 뿐이었다. 베트남 공산당의 비공산주의 내셔널리스트 세력에 대한 탄압과 배척의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https://gall.dcinside.com/m/war/1811863|올라간다]]. 실제로도 호찌민은 비교적 온건한 성향의 정치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나 그에게 붙은 일종의 '성자 신화'가 말하는 것처럼 같은 민족을 해치고 싶어하지 않는 순수한 사람 역시 아니었으며, 오히려 사상적인 다원주의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베트남 독립 후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 정책에 반대하던 베트남 농민들의 반정부 시위를 군경을 동원해 유혈진압했던[* 사실 이 부분은 다소 좀 복잡하다. 자세한 건 [[호치민]] 문서 참조.] 인물이었다.[* 사실, 공산주의가 현실에 정착하게 된 사건인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진행되었나를 보면 이후 세계 각지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이처럼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성향을 띄는 것은 다소 일반적인 경향이다. 공산주의 체제를 유의미한 반발 없이 운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 애초에 권위주의적 체제에 반대한 공산주의자들이 '소아병' 취급 받았던 역사와 각지의 공산당들이 권위주의적 엘리트 계층으로 변질되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노동계급이 온전히 공산주의 체제에 동조할 것이라는 장담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늦어도 1947년에는 이런 사정을 전부 파악하고 있던 걸로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7v06/d138|보인다]]. 베트남에서 독립운동 세력은 베트민만 있던 게 아니고, 북쪽에는 베트남 국민당(VNQDD)나 대월당, 남쪽에는 종교파 세력 같은 다른 세력들이 즐비했다. 이들 대부분이 2차대전 때는 [[찬드라 보스]]의 인도 국민군처럼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원리로 일본군과 협력했기에 미국의 편이 아니긴 했으나, 종전 이후로는 이미 일본은 망했고, 이들 비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더 이상은 미국의 적이 아니었다.[* 또한 프랑스 역시, 찬드라 보스의 부하들을 체포해서 재판에 넘겼던 영국 당국과는 달리 종전 이후로는 이러한 반공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좀 호의적으로 대했던 편이다.] 이런 대체제들이 있던 마당에 호찌민과 베트남 공산당을 미국이 지지할 만한 이유는 단 1%도 없었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부패의 극을 달리던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년 10월 26일의 국민 투표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된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응오딘지엠]]은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는지 일본군이 물러간 초기에 호찌민이 응오딘지엠에게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안한 일도 있었다. 응오딘지엠은 적극적인 농업 투자를 통해 쌀 수확량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고 고무농장들을 대량으로 신설했으며, 매우 적극적인 외자 유치를 통해 유리공업과 면직물 공업을 크게 육성했다. 그리고 질 좋은 수산물을 수출하는 등 경제성장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다. 경제적인 업적뿐만 아니라 불교도 군벌과 범죄조직 소탕으로 치안도 안정되어 수도 사이공에서는 담이 낮아도 도둑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남베트남 전역에서 만연해 심각한 사회 문제였던 매춘도 금지시켰다. 호치민 정권의 반대파 탄압을 피해 월남한 최소 수십만 단위의 북베트남민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업적까지 세웠다.[* 출처는 '나라를 빼앗긴 군대의 비망록-월남군, 그들의 이야기'라는 서적] 하지만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서 테러를 일으키고 폭력 투쟁을 선전, 선동해나가며 남베트남의 민심을 교란했다. 한편 응오딘지엠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지주 계급의 눈치나 보다가 토지 개혁에 실패하며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정권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응오딘지엠의 일가족들이 국가 요직은 물론이고 경제권까지 독점했고, 원조 기금은 경제 개발 계획에 사용되지 않으며 사치품 수입에 낭비된다. 예컨대 베트남은 농경 국가인데 농업용 비료 수입에는 고작 200만 달러를 쓰면서, 사치품인 양[[담배]] 수입에 650만 달러를 쓰는 행태를 보여줬다.[* 검소한 생활을 한 호치민도 양담배만큼은 매우 좋아했다.] 이러한 행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동생인 응오딘누를 두목으로 하는 비밀 경찰을 조직하여 반대파, 경쟁자들을 마구 투옥시킨다. 이 때문에 겨우 안정되었던 치안도 다시 악화되고,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국민 여론도 악화되었다. 그리고 1960년 12월에는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N.L.F.)'''이 결성되었다. '''[[베트콩]]'''(Vietnamese Communists, V.C.)은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 남민전) 산하의 무장 게릴라 단체를 이르는 말이다. 이 베트콩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워 독립을 이룬 [[베트민]](Viet minh)과는 다른 조직이었다.[* 번외로 구찌유격대는 베트콩들이 거대 지하도시에서 만든 조직으로 미군 입장에선 베트남 게릴라 단체 중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이렇게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가 표면화되자 COSVN(Central Office for South Vietnam, 남베트남 중앙국)은 남베트남 여기저기서 준동을 시작, 1961년에는 미국 추산 30만 명으로 확대된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지원으로 소위 "전략촌 계획"을 추진, 이에 대처하려 했으나 정부의 부패와 미국의 무능함으로 인해 그에 지원된 기금은 권력자의 뒷주머니만 채워줬고, 지원된 미제 무기는 베트콩의 것이 되는 역효과만 낳았다.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조차 감당할 여력이 안됐다. 그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1963년 베트콩 게릴라와 남베트남군 사이에서 벌어졌던 [[압박 전투]]다. 1963년의 압박 전투는 1,500~2,500명의 정부군이 200~300여 명에 불과한 베트콩 게릴라에게 처참히 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이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과거 응오딘지엠의 지지자였던 조셉 버팅어의 경우 책에서 2,500명의 남베트남군이 250명의 베트콩에게 패전했다고 썼다.] 압박 전투에서 베트콩측이 18명의 전사자를 낸 것에 비해 연합군측은 86명(남베트남군 83명, 미국 군사 고문단 3명)이 전사하고 미군 헬기 5대가 파괴됐다. 또한, 베트콩은 투입됐던 남베트남군의 장갑차까지 막아냈다. 이처럼 남베트남군은 베트콩과의 교전에서 참으로 허접한 모습을 보였다. 1963년에는 큰 재앙이 하나 더 일어난다. 미국이 응오딘지엠 제거를 결정, CIA를 동원해 남베트남 장군들에게 거금을 찔러주고 쿠데타를 사주한 것이다. 응오딘지엠은 별 저항도 못 해보고 쿠데타군에 의해 살해당한다. 케네디는 이 결정이 남베트남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실상은 어림도 없었다. 응오딘지엠의 치세 동안 빠른 경제성장과 정치 안정을 누리던 남베트남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장군들이 정권을 다투면서 대혼란에 빠져든다. 이것을 기회로 베트콩은 농촌에서 세력을 대폭적으로 확대한다. 1964년, 1965년에는 빈 지아(Binh Gia) 전투와 동 쏘아이(Dong Xoai) 전투에서 레인저와 해병, 공수부대를 포함한 남베트남 정예병력이 북베트남에서 박격포와 무반동포까지 지원받은 베트콩에게 갈려나가기까지 했다. 이렇게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도 장군들은 파벌 싸움과 쿠데타에만 광분해 제 살을 깎아먹는게 당시 남베트남군의 모습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